[광야에서의 편지] 창세기35장 “벧엘로 올라가라! & 일어나라 나의 용사여!”

“창세기 강해”

창세기 35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

 

창세기 35장을 4단락으로 나누어 본다면,

  • 35:1-15 Return to 벧엘!
  • 35:16-21 라헬의 죽음
  • 35:22-26 야곱의 12아들
  • 35:27-29 이삭의 죽음

 

34장 세겜에서의 디나 강간사건과 야곱 아들들이 세겜남자들을 대량학살시킨 사건을 통해 크게 데인 야곱은 그 시간이 참으로 좌절되고 낙망되었을 겁니다.

 

자신의 딸이 그런 비참한 일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제 이 가나안땅에서 살 자신과 자신의 가족에 대해 가나안족속들이 이를 박박갈며 미워하고 있을게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어떻게 해야할지 전혀 no idea 멘붕이 온 바로 그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정착하여 네가 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때에 너에게 나타났던 나 하나님에게 단을 쌓아라‘ ]

 

창35장 4

 

하나님의 주특기가 나옵니다. 벼랑끝으로 몰고가셔서 하나님의 음성에 간절해지게 만드시곤 완전한 어둠속에 한줄기 빛처럼 그분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20여년전 벧엘에서 나를 만났던 그 첫사랑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 첫사랑을 회복하자고 하시는 겁니다. 고생했던 그때는 주님밖에 의지할게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사랑하는 사람도 생기고 재물도 많아지고 살만해 지니.. 지금 의지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아지게 된 겁니다..

 

 

★Application

때론 우리들도 시간이 지나니 주님이 주신 사명을 너무 쉽게 잊어버리고 혹은 포기한 채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충만했을 때는 뭐든지 하겠다고 자신만만하게 고백했는데 내가 언제 그랬냐는듯 전혀 그 약속과 다른 삶을 내가 지금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한번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아니 까먹고 있었던 주님의 사명을 기억해야 할 때입니다.

 

‘아 맞다! 내겐 그런 사명이 있었지!’ ‘주님이 내게 주셨던 비전이 있었지!’

 

이빨 빠진 호랑이 어디 계십니까? 눈 먼 독수리 어디 계십니까? 닭 쫓고 있는 곰 어디 계십니까? 영적인 눈도 닫히고 영적인 힘도 다 잃고 삼손처럼 오늘도 손과 발이 묶여 노예처럼 맷돌만 갈고 계시진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런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나의 용사여!” “깨어날찌어다!” “얄라!”

 

 

 

 

 

 

 

 

[창35:2 그래서 야곱은 가족들과 그리고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외국인의 신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며 의복을 갈아입어라. 3절 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 내 기도를 들어주시고 내가 가는 곳마다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고 한다’ ]

 

이제야 야곱은 하나님의 마음을 눈치챕니다.

 

‘아, 내가 세겜에 너무 오래 눌러앉아 있었구나!’, ‘그렇지! 그래 맞다! 나에겐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 벧엘에서 나타나셨던 하나님과 했던 약속이 있었지!’

 

  • 창28:20-22 그리고서 야곱은 하나님께 맹세하며 말하였다. ‘만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셔서 이 여정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셔서 나를 내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내가 기념비로 세운 이 돌은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내가 반드시 십일조를 드리겠습니다’

 

 

 

이제 야곱이 정신을 차리니 내안에, 또 우리안에 어느새 들어온 더러운 쓰레기들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동안 보이지도 않던, 느껴지지도 못했던 더러운 죄악들이 밝은 빛으로 성령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조명하실 때 그때 바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주시는 거룩함의 삶이 아니면 지금 내가 똥을 가지고 놀고 있는지, 똥을 얼굴에 칠하면서 ‘아, 예쁘다’ 하고 있는지.. 전혀 볼 수 없는 영적인 소경이 되는 겁니다.

 

성령충만하지 못한 상태에선 음란한 영상을 볼 때도 그게 너무 달콤하고 매력적인 영상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선 그 영상들이 썩은 시체에서 구더기가 우글우글 나오는 것처럼 역겹게 느껴질 겁니다. 남자들이여, 정신차리십시다!

 

음란뿐 아니라 내 안의 거짓말, 미움, 분노, 시기, 비방하는 말, 욕심, 중독, 교만함! 이런 것들이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하시길 축복합니다. 그게 바로 축복의 시작입니다.

 

 

야곱의 가족들안에는 이미 너무 많은 우상들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라헬이 아버지가 섬겼던 ‘드라빔’ 우상을 포함해 세겜에서 몇 년동안 살며 그 땅의 수많은 우상 신들을 가져왔던 겁니다. 이 말은 야곱이 그냥 보고 방관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도 아내들이 가져오는 그 우상들 하나씩 하나씩 다 받아들이다가 결국 망가지지 않았습니까? 야곱가족안에 귀신들이 득실댔던 겁니다.

 

 

 

정신이 바짝 난 야곱은 종교개혁?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4가지를 실행합니다. 자 한번 보실까요?

 

  1. 가지고 있는 모든 우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라!

 

창35장 8

보통 눈에 보이는 이러한 형상화된 우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더러운 죄와 귀신이 따라오게 마련입니다. 누구는 “에이~ 그냥 나무조각인데 뭘 그러겠어?” 그래서 외국에 갔다가 멋도 모르고 그 나라 귀신이 붙은 목걸이 귀걸이 각종 펜던트나 관광상품을 사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단기선교갔다 오실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선물 나준다고 아무거나 사시지 마십쇼. 만약 그냥 아무 의미없는 귀걸이였다면 야곱의 가족이 왜 굳이 그 아까운 귀고리들까지 버려야 했겠습니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중에 거룩하지 못한 것들, 과감하게 버리십쇼! 저는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 동안 중,고등학교때 헤비메탈 밴드를 하며 나를 날마다 우울하고 폭력적으로 만들었던 전도사들! 즉, 벽 하나를 까득 메울만큼 쌓였던 바로 사탄을 찬양했던 음악 테이프들과 CD들을 모두 싹~! 다 버렸습니다.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정리할 무언가가 있진 않으십니까? 여러분이 떠나기에 발목 잡는 놈?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2. 의복을 갈아 입어라!

창35장 7

 

성경에서 “옷”은 ‘신분’을 뜻합니다. 그래서 “옷을 찟는다”는 의미는 ‘나의 신분을 찟는다’ 즉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옷을 갈아입는다는 의미는 어떤 의미인지 아시겠죠?

 

요한계시록과 스가랴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계19: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결혼 날이 왔다. 신부는 몸단장을 마치고 8절 빛나고 깨끗한 모시옷을 받아 입었으니 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이다.’

 

 

  • 슥3:4 그때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천사들에게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고 명령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내가 네 죄를 없애 버렸으므로 너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겠다.’ 하고 말씀하셨다.

 

 

아멘아멘!!

 

그래서 성경에서 옷은 중요한 의미임을 계속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분이 바뀌어져 버린 사람들입니다. 사탄이 우리의 약점을 고소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셨고 그 용서하신 표로 또 그 깨끗한 옷까지 주셨습니다.

 

근데 그 의복을 입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 마22:11 왕이 손님들을 보려고 들어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절 ‘그대는 어째서 예복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는가 ?’ 하고 묻자 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13절 그때 왕은 종들에게 ‘이 사람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곳에 던져라. 거기서 통곡하며 이를 갈 것이다.’ 하였다.

 

 

여러분, 우리는 위에 나와있듯이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분의 보혈로 의로워 졌다면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그것을 증명해 내야 합니다.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계19:7)라고 분명히 적혀있습니다.

 

여러분, 더러운 옷 계속 입고 계시지 마시고 꼭 옷을 갈아입으십쇼!

 

 

     3. 벧엘로 올라가자!

 

창35장 16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절대 안주하지 않습니다. 천국갈때까지 안주하지 않고 달려가는 자들입니다!(딤후4:7)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계속 도전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뒷걸음질 치지 않고! 주님이 말씀하신 곳을 향해 꿋꿋이 가는 자들입니다! 아멘!

 

(이것은 위에 많이 이야기했으니 요쯤에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4. (예배의) 단을 쌓자!

 

창35장 16

여러분, 달려가는 길에 예배가 빠지면 반드시 가다 지칩니다. 쉽게 넘어지고 아니 갈수가 없습니다. 마라톤의 생수와 같다고나 할까? 자동차의 기름이라고 해야할까?

 

이것 없이는 달려갈 원동력도, 힘도, ‘지금 내가 왜 달려가고 있지?’ 달려갈 목적도, 쉽게 상실해버릴 겁니다. 여러분은 얼만큼 예배하고 있습니까?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예배로 만족하고 계시진 않으십니까? 아니면 두번?? 여러분, 예배의 강력한 기름부으심의 파워의 비밀을 알았던 다윗은 24시간 끊기지 않는 예배를 올렸습니다.

 

“에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24시간 예배를 드려요~ 그건 불가능해요~” 네 맞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배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배라 한다면 교회당가서 찬송가 부르고 성경봉독하고 말씀듣는걸 예배라고 생각하지만 예배의 의미는 더욱 광범위합니다.

 

다윗은 양들을 치면서, 또 양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면서 예배했다고 봅니다. 들판에서 강대상은 없지만, 프로젝트도 없고, 헌금바구니도 없지만 깊은 묵상중에 하프를 키며 혼자 자연안에서 예배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 형식의 틀을 좀 깰 필요가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만나는 깊은 예배는 여러분이 아침에 화장실에서 응가를 하거나 샤워중에도, 어디를 가는 버스나 전철안에서도, 친구와 만나 이야기하는 중에서도, 쌀을 씹어먹는 순간에도 감사와 찬양의 예배가, 복음이 흘러나오는 예배가 드려질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 예배할 때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육적인 세상에서 영적인 세상을 만나고 볼 수 있는 통로를 만드는 순간입니다. 그 통로는 또한 거룩하신 성령님이 오실 수 있게 하는 통로입니다.

 

거룩한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는 순간, 유한한 육적인 세상에서 무한한 영적인 하나님의 비젼을 보게 되고 그것을 보는 순간 나의 갇혀있던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좁고 편협하고 작았는지를 느낌이 드는 동시에 나의 인간적인 사고의 틀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걸 어떻게 말로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예배만 생각하면 일요일 드리는 예배당에서 거~룩하고 조용하게 앉아서 드리는 것이라는 이런 따분한 틀에서 벗어나, 혹은 예배는 ‘숨막히는 경~건한 1 시간’이 아니라,

 

매일 매일 너무 신나는 파티와 같이 즐겁고! 또 여러분이 정말 좋아하는 맛있는 레스토랑에서 외식을 기다리는 기다림같고! 사랑하는 사랑과 팝콘을 먹으며 설레임으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고! 때론 이산가족이 몇 십년만에 만나는 감동의 드라마 같기도 한! 바로 그것이 예배라는 사실을 깨달아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물론 항상 저런 마음으로만 예배할 순 없을 겁니다. 때론 너무 가슴이 찟어지게 아픈 상황에서, 때론 지치고 고된 심정으로, 때론 외롭고 우울하기도 한, 때론 너무 화가나기도 한 그런 상태에서 그런 깨어진 상한심령을 가지고 나아갈때조차도 예배하기로 결단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중에 여러분을 반드시 만나주실 거라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 기억합시다!

 

지금 이 시대는 나를 거룩함으로 정비하고 하나님의 사명과 비전을 기억해서 나를 깨우고 일어나야 할 때입니다. 영적인 야성을 키워야 할 때입니다. 버려야 할 것들을 미루지말고 버리시고 여러분의 더러운 옷을 갈아입으시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곳으로 다시 달려가시길 그리고 쉬지않고 예배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오늘 이 말씀이 또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 이 순간 도전이 되어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창35:4 그들이 가지고 있던 외국인의 우상과 귀에 달고 있던 고리를 빼어 야곱에게 주자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에 있는 상수리나무(אֵלָה) 아래에 묻었다. ]

 

[창35:8 이 무렵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어 벧엘 아랫지방 상수리나무(אֵלוֹן) 밑에 장사되었으며 그때부터 그 나무 이름을 ‘알론-바굿’이라 하였다. ]

 창35장 9

(현재 벧엘지역의 상수리나무와 그 옆에 발견된 굴)

 

야곱의 두리뭉실한 성격을 이해한다면, 세겜에서 몇 년 동안 살면서 그 땅에 살고 있는 거민들과 교류하며 그들이 섬기고 있는 우상들에 대해서도 특별한 거부감없이 제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이 가지고 나온 드라빔에 대해서도 강하게 제재했다는 구절이 없습니다. 라헬이 가지고 나왔을 정도면 데리고 나온 종들도 각자 다들 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특히 여기 이 세겜땅에서 야곱가족의 여자들은 그때 당시 잘 나가던 세겜의 유행에도 민감했을 겁니다. 온갖 목걸이 반지를 포함한 온갖 장신구들과 장식품들도 구입했을 겁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많은 세상의 물이 들어와 있었던 거죠.. 그것들을 이제 과감하게 빼냅니다. 그리고 버립니다. 값으로 따지면 아주 비쌌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생각하기엔 이건 미친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 값비싼 것을 왜 버리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 소망을 두는 믿는 성도들은 세상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동을 해야만 할때가 있습니다. 바보같이 보일지라도, 세상이 조롱할 지라도 때론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극단적 믿음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상수리나무“에 대해서 한번 살펴봅시다.

 

우상들을 세겜의 상수리나무(אֵלָה) 아래에 묻습니다. 자 그런데 그 밑의 구절 창35:8에 보면, 벧엘에서도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를 상수리나무(אֵלוֹן)에 묻게 됩니다.

 

 

 

자 그럼 여기서 불편한 진실~!

 

세겜에서 우상을 묻었던 상수리나무”와 “벧엘에서 유모 드보라를 묻은 상수리나무”가 같은 나무일까요?

정답은 No~! 입니다.

 

 

  • 세겜에서 우상 묻었던 상수리나무 = 히.엘라(אֵלָה), 이건 terebinth(테레빈)이라는 종류의 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한국에 없습니다. 이 나무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머리가 걸려 죽었던 나무였습니다. (삼하18:9)

 

창35장 11창35장 12

 

 

 

  • 벧엘에서 드보라를 묻었던 상수리나무 = 히.엘론(אֵלוֹן), 이건 참나무(oak tree)과 도토리나무입니다.

 

창35장 10 창35장 11

 

 

 

또 한가지 불편한 진실~!! 이 세겜에서 우상을 묻었던 상수리나무를 보통 창12:6에 나오는 그 아브라함의 세겜의 상수리나무라고 많이들 생각합니다.

 

  • 창12:6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אֵלוֹן)가 있는 곳에 이르니 그 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요? 세겜에서 우상을 묻었던 상수리나무 (엘라, אֵלָה)가 아니라, 벧엘에서 드보라를 묻었던 상수리나무(엘론, אֵלוֹן) 와 같은 도토리나무입니다.

 

발음이 비슷해서 그런지 한국말 번역상에 같은 나무로 기록했는데 사실은 완전히 다른 나무입니다.

 

 

 

이제 좀 정리가 되시죠? 더 헷갈리시나요..? ㅡ,ㅡ;; …  어쨌든 중요한 건, 묻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을 출발할 때 “우상”을 묻었고, 벧엘에 도착해서는 사랑하는 유모 “드보라”를 묻었습니다.

 

우린 우리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는 죄된 심성과 죄악을 묻어야 하지만, 때론 반대로 우리에게 너무나 유익이 되고 하나님의 선물과 같은 사랑했던 것을 묻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당연한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참 마음이 아프고 가끔은 이해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민제’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굉장한 전도자요 정말 신실한 예배자였습니다. 성품도 끝내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통사고로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젊은 나이로 하나님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님, 이건 하나님입장에서 손해일텐데요, 왜 데리고 가셨습니까? 도대체 왜요!?’ 눈물이 났습니다.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는 저에게 그 순간 하나님께서 “밀알”이라는 단어를 말씀하셨습니다. 요동치던 제 마음이 고요해지며 이렇게 기도를 올려드렸습니다.

 

‘주님 그렇게 일하여 주시옵소서…’

 

실제 그 친구의 죽음을 통해 많은 영혼들이 도전을 받았고 또 주님께 돌아왔고 또 그 이후에도 (제가 잘 알진 못하지만) 많은 영혼들이 그의 밀알 같은 죽음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있다고 믿습니다. – 그 친구가 죽기 전, 남기고 간 음성데모와 그 친구가 쓴 찬양을 ‘로즈피플’이란 예배팀을 통해 앨범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전히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창35장 17

 

이렇듯, 때론 우리가 사랑했던 것을 묻어야 할 때가 있지만 귀한 생명의 죽음은 또 다른 생명으로 잉태되는 놀라운 비밀이 있기에 우리는 낙심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는..

 

리브가가 이삭에게 시집들러 올 때 같이 밧담아람에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창24:59)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밧담아람으로 도망갈 때 성경을 유추해 보면 유모 드보라는 같이 안 갔었던 걸로 보입니다. 그러면 유모 드보라는 언제부터 야곱일행과 함께 했을까요?

 

정확한 답은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도 야곱이 밧담아람에 있을 때나 혹은 세겜에 있을 때 리브가가 야곱을 위해 보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야곱은 어렸을 때 드보라가 키웠기 때문에 드보라는 야곱에게 마치 자신의 어머니 같은 느낌과 향수가 있었을 겁니다. 한마디로 그녀를 많이 의지했을 겁니다. 그 의지하고 사랑했던 유모 드보라도 하나님께서 데리고 가셨던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낙담될 수 있었던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창35:9 야곱이 메소포타미아에서 돌아왔을 때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그를 축복하시고 10절 ‘네 이름이 야곱이지만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하시며 그를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다(קָרָא). ]

 

창35장 12

 

사실 야곱의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어 질 것이란 말은 얍복강에서 이미 있었던 장면(32:28)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땐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씨름 한참 하고나서 이름은 왜 또 갑자기 바꾸라고 하시는지?! 그러면서 이제 세겜에 살면서 그 이름을 받았던 기억조차 희미해 졌을 겁니다.

 

하나님에겐 하나님의 큰 구속사 계획 가운데 주인공인 그 ‘이스라엘’ 이란 이름이 너무 중요했던 겁니다. 야곱이 그 이름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것 같으니 다시 한번 직접 나타나셔서 쇄기를 박으십니다!

 

“야야~~! 너 그 이름 까먹으면 안돼~~!! 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이름인데.. 너 이름은 이 스 라 엘! 이야.. 기억해 이 스 라 엘!!”

 

그리고는 이번엔 까먹을까봐 친히 그의 이름을 불러(קָרָא)주십니다. 야곱은 참으로 자주 하나님을 뜨끔하게 만듭니다.

 

 

 

 

 

 

 

 

[창35:5 그리고서 그들이 그 곳을 떠났으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주변의 모든 성에 엄습하므로 그들을 추격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

 

잠시 다시 위로 올라갑니다. 세겜에서 우상을 다 버리고 정결하게 하고 이제 벧엘로 출발하는데 아무도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구절이 무엇을 생각나게 합니까? 네~ 바로 훗날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백성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이집트가 완전 박살나면서 주변국들이 “이스라엘”이란 민족에 대해 벌벌 두려워 떱니다. (수2:9-10, 5:1, 6:1)

 

거룩하게 성별된 자들을 하나님께서 지키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실제로 하나님께서 임재가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면 뭔가 범접하기 힘든 뭔가.. 뭔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말로 설명할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지 않습니까?!

 

아간의 죄를 해결하고 이제 거룩하게 성별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 이후 백전 백승합니다.

 

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무엘에게 다윗이 사울로부터 도망칩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으려고 사람들을 보내는데 라마나욧 마을로 보내는 족족 들어가는 순간, 하나님의 영에 취해 모두 예언합니다. 사울까지도..

 

다윗도 밧세바 사건 이전까진 하나님과 철저히 동행할 때 백전백승 주변국들이 떱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했던 다니엘을 통해 느부갓네살; 한 나라의 왕도 함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단4:34) 그 외에도 성경은 줄줄이 기록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사람의 파워입니다. (물론 때론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 공격이 들어올 순 있지만) 내가 거룩한 삶을 결정할 때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나의 삶을 장악하신다면 우선 사탄이 쉽게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의 삶에서 거룩의 능력과 성령의 임재가 퍼져나가게 됩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반드시 느끼고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 바라는 것은 여러분과 저의 삶속에서 이 강력한 “거룩함의 능력”이 온전히 퍼져나와 세상 사람들도 우리의 삶을 목격하면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어 그분에 대한 “경외함”이 생기게 되고,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고 구원자에 대한 열망함이 생겨 순복하고 엎드려지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기를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창35:16 그리고서 그들은 벧엘을 떠나 에브랏으로 이동하고 있었는데 에브랏에 약간 못 미친 곳에서 라헬이 해산할 때가 되어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17절 난산으로 그 고통이 더욱 심해지자 산파가 그녀에게 ‘두려워하지 마세요. 또 아들입니다’ 하고 위로하였다.

 

 창35장 5

 

18절 그러나 라헬은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숨을 거두면서 자기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라고 지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베냐민‘이라고 하였다. 19절 이렇게 해서 라헬은 죽어 에브랏 곧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에 장사되었다. ]

 

창35장 13

(왼쪽은 1870년대 라헬의 무덤, 오른쪽은 현재 라헬의 무덤 입구 전경)

 

 

라헬은 벧엘을 떠나 헤브론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베들레헴(에브랏)에 다다랐을 때 야곱의 마지막 12번째 아들 “베냐민”을 낳습니다.

 

라헬은 태어나는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בֶּן־אוֹנִי)라고 지으려 했습니다.

  • 벤오니 = 벤(בֶּן, 아들) + 오니(אוֹנִי, 슬픔,불행)

 

하지만 야곱은 베냐민(בִּנְיָמִין)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 베냐민 = 벤(בֶּן, 아들) + 야민(יָמִין, 오른쪽(손) – 오른손은 성경에서 주로 힘, 권능, 축복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벤오니라는 이름에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슬픔에 젖어있는 라헬의 심정을 잘 보여줍니다. 하지만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부인 라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긍정적인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심정이 ‘베냐민’이라는 이름속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 리브가, 야곱과 레아까지 모두 헤브론에 묻혔습니다. 그런데 라헬만 여기 “베들레헴”에 묻힙니다.

 

실제 베들레헴에 가보면, 라헬의 무덤이 있는데요, 이 라헬의 무덤에서 지금도 여전히 수많은 유대인들이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리고 이 라헬의 무덤은 유대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 렘3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라마에서 한 소리가 들리니 슬퍼하고 통곡하는 소리이다. 라헬이 자식을 잃고 슬퍼하며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구나.’ 16절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신다. ‘너는 울음을 그치고 눈물을 거두어라. 네 일이 보상받을 것이며 네 자식들이 원수의 땅에서 돌아올 것이다. 17절 너의 미래에 희망이 있을 것이니 그들이 고향 땅으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나 여호와의 말이다.

 

 

 

이 구절은 라헬이 죽고 약 1000년 이상이 지난 뒤, 우리가 잘 아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예언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라마에서 라헬의 울음소리가 있다고 말했는데 이 “라마”라고 언급한 지명 이름때문에 라헬의 무덤위치를 찾는데 더 애매해 집니다. 현재 이스라엘에서 라마는 예루살렘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재 라헬무덤이 있는 베들레헴(예루살렘 남쪽)과는 전혀 다른 곳이 됩니다.(베들레헴에서 라마까지 약14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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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또 이 ‘라마(רָמָה)’라는 단어의 의미인 “높다”라는 의미로 해석할것이냐 아니면 경계상 에브랏과 라마를 같은 경계에 있던 지역으로 이해하느냐 라는 여러 고고학적 논쟁거리들이 있기에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자, 넘어가서,

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보면 라헬이 자식을 잃고 슬퍼한다는 표현은 1차적으로는 BC 586년에 남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완전 박살나면서 포로로 잡혀가는데 그 이스라엘백성을 바라보며 라헬이 운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표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라헬의 무덤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그녀의 후손(자녀)들)의 모습을 보며 라헬이 울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저 위의 말씀의 후반부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네 자식들이 원수의 땅에서 고향땅으로 돌아올 것” 이라는 예언 때문입니다. 그렇게 잡혀갔지만 실제 하나님의 말씀대로 페르시아 시대때 이스라엘은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2차적인 예언성취는 AD 70년에 또다시 일어납니다. 로마에 의해 이스라엘이 박살나면서 전세계로 유대인들이 흩어져나갑니다.

 

그리고 약2000년만에 나라없이 흩어졌던 유대인들이 나라로 돌아와 드디어 1948년 ‘이스라엘’나라가 다시 세워집니다! 그리고 이 예레미야의 예언을 여전히 유대인들은 기억하며 라헬의 무덤에 와 이렇게 울며 이야기하며 기도합니다.

 

“엄마! 우리 돌아왔어요! 우리를 위해 울어줘서 고마워요..”

 

창35장 15

 

 

 

 

 

 

[창35:22 야곱이 그 땅에 살고 있을 때 르우벤이 자기 아버지의 첩 빌하와 정을 통하였고 야곱은 그 일을 듣게 되었다. ]

 

야곱의 첫째 아들 르우벤이 패륜적인 아주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 분명히 근친상간이자 아버지의 권위와 명예를 짓밟는 행위였습니다. 자신의 형제 단과 납달리의 엄마였는데 내 동생들을 생각했어도 이런 이해못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여러분, 왜 르우벤이 이랬을까요? 전 순간 딱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전에 계속 말씀드렸었죠. 하나님의 구속과도 연결된 하나님의 언약(약속)은 아브라함이라는 믿음의 조상을 통해 세대에서 세대로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연결 포인트마다 사단은 그 언약의 연결점들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갖기 바로 직전에도 아비멜렉왕을 통해 씨가 바뀔뻔 했고(창20장), 이삭의 장자였던 에서는 하나님의 언약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고(창28:8-9), 장자권을 산 야곱은 삼촌 라반과 에서를 통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습니다.(창31:24,33:1)

 

이번엔 야곱의 첫째 아들이 사고를 칩니다. 첫째 아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운반할 장자였기 때문에 너무 중요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언약을 멈추게 하기 위해 또다시 장난을 쳤음이 확연히 보여집니다. 아주 중요한 순간마다 사탄은 그 순간을 절대로 놓치지 않죠! 그리고 공격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르우벤은 야곱의 축복도 제대로 받지 못했을뿐(창49:3-4) 아니라 장자권도 박탈되고(대상5:1), 훗날 르우벤지파에선 그 어떤 ‘사사’나 ‘선지자’나 ‘왕’도 배출되지 못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됩니다.

 

 

★Application

여러분, 르우벤도 한순간에 훅 갑니다. 우리에게도 얼마나 자주 죄의 유혹이 들어옵니까? 이것쯤이야, 이거 한번쯤은 괜찮겠지.. 내가 생각하기에 별로 대단한게 아닌 사소한 것이라 생각했던 그 허용했던 죄악이 나를 한순간에 무너뜨릴수 있음을 우리는 르우벤을 통해서 경고를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시대 얼마나 많은 훌륭했던 사역자들이 음란한 관계와 돈과 야망 때문에 우두두둑 떨어지고 있습니까? 처음엔 이 정도쯤이야 라고 생각을 허용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점점 나를 사로잡아 이제 행동하게 합니다. 더 큰 것을 미친듯이 바라게 됩니다. 마치 중독이 된 것처럼.. 이젠 끊을 수가 없습니다. 떨칠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절대 이 상태까지 가면 안됩니다. 아니 그때라도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잘라내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눈에 불을 켜고 사단도 마지막 싸움을 준비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멋지게 디자인하시고 부르신 준비되어있는 사명자들 사역자들을 어떻게 해서든 후벼파서 넘어지게 만들려고 하고 있습니다. 오 주님… 도와주시옵소서! 누가 이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겠습니까?

 

그 사탄의 올무에 매여 맥없이 꽃도 피기전에 망가지지 맙시다. 후회할 짓 하지 맙시다. 여러분, 죄의 유혹앞에서 손도 대지 말고 보지도 말고 맛도 보지 말고 뒤돌아 요셉처럼 도망칩시다!

 

저도 여러분도 너무 멋진 사명을 가진 멋지고 아름다운 사명자들입니다. 우리 끝까지 주의 언약과 생명의 말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 곁으로 가는 날까지 순결하게 그리고 멋지게 사용받다 갑시다.

 

주님, 이 악한 세대속에서 저희들을 온전히 지켜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신부로 하나님, 우리가 주의 얼굴을 당당히 바라보며 주의 임재안에서 매일 살아가게 하소서. 언제든 넘어질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주의 도우심(에쩨르, עזר)과 지키심(샤마르, שמר)이 우리에게 오늘도 충만히 둘러쌓이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david-and-goliath

 일어날찌어다 하나님의 용사들이여!!

 

 

 

 

by Chris Cha

주님오심을 기다리며 in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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